조선후기 미국 또는 프랑스 로부터 개화하고 신문물 받아들여서 군대양성하고 그랬다면 일본한테 조선후기 미국 또는 프랑스 로부터 개화하고 신문물 받아들여서 군대양성하고 그랬다면
조선이 강화도 조약(1876년) 이전인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나 신미양요(1871년, 미국) 당시에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에 매진했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일본에 병탄되지 않았을지, 역사적 관점에서 몇 가지 핵심 요소를 분석해 드리겠습니다.
1. '골든타임'의 확보 (약 10년의 격차)
일본이 근대화에 본격적으로 성공한 '메이지 유신'이 186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조선이 1866년 프랑스와의 교전 직후나 1871년 미국과의 교전 직후에 개항했다면, 일본과 거의 동시에 근대화를 시작하는 셈이 됩니다.
1) 군사력: 서구의 소총, 대포, 군함 제조 기술을 10년 일찍 받아들였다면,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일본의 무력 도발에 무력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기술 축적: 일본이 조선을 압도하기 전, 조선도 서구 기술을 바탕으로 자체적인 방어 능력을 갖출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2. '세력 균형'을 통한 외교적 방어
당시 서구 열강(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일차적 목표는 영토 점령보다는 '통상(무역)'이었습니다.
1) 일본 독점 방지: 조선이 일찍 미국이나 프랑스와 정식 수교를 맺었다면, 일본이 독점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서구 열강들이 견제했을 것입니다.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등을 이용한 외교가 가능해짐)
2) 국제법적 보호: 일찍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자주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면, 일본이 '무주지(주인 없는 땅)' 논리를 내세워 침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3. 내부적 변수: 개혁의 의지와 역량
단순히 문을 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개혁하느냐'였습니다.
1) 지배층의 분열: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수구 세력의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개항을 했더라도 내부적으로 기득권 싸움이 치열했다면, 오히려 청나라나 러시아의 간섭만 더 심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2) 재정 문제: 근대적 군대를 양성하려면 막대한 돈이 듭니다. 일본은 세제 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했지만, 조선이 단기간에 농업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재정 구조를 바꿀 수 있었느냐가 관건입니다.
4. 결론: 안 먹혔을 가능성이 높았을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1) 낙관론: 태국(샤무)의 사례처럼 영·프 사이에서 교묘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독립을 유지했을 수 있습니다.
2) 비관론: 개항 후에도 내부 부정부패와 당파 싸움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일본 대신 다른 서구 열강의 식민지나 보호국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결국 10년 앞선 개항은 조선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를 손에 쥐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를 활용해 일본의 야욕을 막아내는 것은 국가 시스템 전체를 얼마나 빨리 뜯어고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