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23:59

우리나라에 전래된 감리교 우리 나라는(대한민국) 조선 말기에 개화정책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아울러

우리 나라는(대한민국) 조선 말기에 개화정책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아울러 천주교가 공인되고 개신교가 수용되면서 종교적 변화를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요, 1885년에 우리 나라에 감리교가 전래되었는데,       우리 나라에 전래되던 감리교는 어느 나라에서 들여왔나요?     미국에서 들여왔나요, 영국에서 들여왔나요? 당시 감리교 선교사는 누구였어요?      정확한 내용으로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ai답변을 무단으로 복사붙이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재림 안식교 이단이 와서 답변을 하면 재림 안식교 이단의 답변을 채택하는 것은 재림 안식교 이단의 활동을 적극 돕는 것이 되니 이점 주의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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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아래 선교사의 로버트 매클레이 선교사가 찾아보면 감리교 라고 합니다. 아래 자료들을 보면 한국에서 감리교회의 선교는 미국의 로버트 매클레이 선교사와[1884년] 아펜젤러 선교사가[1885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228 [문단편집 및 강조는 답변자]

한국개신교회사

연원 및 변천

  1. 초기의 접촉과 만주 · 일본을 통한 선교

기독교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디딘 사람은 프로이센 프리츠 출신의 귀츨라프(K. F. A. Guetzlaff)로, 그는 1832년 당시 서해안을 탐사하며 한문 성경을 조선인에게 전하여 주었다. 그 후 1866년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가 선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서해안에 도착하여 평양으로 향했지만, 대동강에서 조선인 병사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토마스를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간주하고 있다.

보다 본격적으로 한국에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70년대 만주를 통해서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파송으로 만주에 와 있던 로스(John Ross)는 만주의 개항장인 주1에서 조선 사람들을 만나 한국 상황을 듣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9년에는 백홍준, 이응찬 등에게 세례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세례였다.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인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또한 동년 9월에 박영호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한 이수정은 일본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미국에 한국의 변화된 상황을 설명하면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1. 한국 선교의 시작과 발전

한국 땅에 실질적으로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 6월 일본 주재 미국 주2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조선에 와서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다음이다.

같은 해 9월 미국 공사관의 동의로 미국장로교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입국하였는데, 그는 12월의 갑신정변에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구해 줌으로서 왕실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그 후 그는 고종의 도움을 얻어 제중원(원래의 이름은 광혜원)을 세웠다.

1885년 미국 장로교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제중원의 업무를 도우면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배재, 이화, 경신, 정신과 같은 기독교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정부는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를 원했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사역은 의료와 교육에 한정되어 있었고, 전도는 금지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였다. 청일전쟁이 보여 준 전통적인 유교의 한계와 동학혁명의 실패, 그리고 서양문명의 위력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정부는 갑오경장을 통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한국 사회를 새롭게 만들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기독교도들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근대적인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20세기 초 한국은 매우 어려운상황이었고, 이에 사회적인 불안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선교사들도 이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발생한 것이 1903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에 절정을 이룬 대부흥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철저한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각성을 통하여 기독교는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아울러서 신앙의 힘으로 나라를 구해 보려는 애국정신도 갖게 되었다.

  1. 일제강점기의 한국 기독교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은 한국 기독교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일본이 통제하기 어려운 반일적인 단체로 보았다. 또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는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탄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단통치 기간에는 각종 교육령을 만들어서 미션 스쿨을 총독부의 통제 아래 두었고, 포교 규칙을 제정해 교회의 집회와 설립도 허가를 받도록 강요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외의 기독교인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주3를 듣고, 이 소식을 국내에 알려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손을 잡고 3 · 1독립 운동을 했고, 기독교 조직을 동원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전국의 기독교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이에 종교단체 가운데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3 · 1독립 선언서의 자주독립국과 비폭력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울러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3 · 1운동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식민지 정책을 바꾸게 만들었다.

3 · 1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두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하나는 보다 영적인 측면에 치중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을 기대하는 신비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자본 육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 절제운동을 통한 도덕의 재무장, 농촌계몽운동과 같은 점진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 안창호와 같은 해외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계해서 그들을 돕고, 외국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공산주의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는 공산주의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무신론 집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입장도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조선에서는 내선일체의 강조와 신사참배 등이 강요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기독교는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고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였으나, 당시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는 이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1938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했다. 또한 일제는 성결교회를 비롯한 작은 교단들의 종말신앙이 일본의 천황제와 배치된다고 해서 교단을 폐쇄시켰다.

1940년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철수하였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미국 유학파 목사들을 친미인사들이라는 이유로 목회 일선에서 추방하였고, 일본은 한국 기독교를 서양 기독교와 분리하여 동양적 기독교를 만들려고 하였다.

  1. 해방 이후의 한국 기독교

해방은 한국 사회에 큰 기쁨이었지만 해방 직후 남 · 북의 기독교는 각각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소련과 마찰을 빚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서구적인 경험과 영어 능력 때문에 미군정의 업무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주요 민족지도자들은 기독교인이었고, 특히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과 더불어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48년 제헌국회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정부와 더불어 반공전선을 강화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유엔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미국 기독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였다. 아울러서 한국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교육, 의료, 사회사업에 힘썼고, 그 결과 급속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은 한국 사회를 비관주의에서 적극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낙관주의로 만들었다. 또한 1960년대의 민족복음화 운동, 1970년대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대회, ‘엑스폴로 74’ 등의 대형집회를 통해서 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동시에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교회의 도움을 받아 박정희 정부의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하였고, 산업화의 부작용과 싸우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 내에 내재해있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강화되었다. 진보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988년 한국 교회의 반공 입장이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교회가 반공을 강조한 것은 회개해야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경직 목사를 대표로 하는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기에 반대하여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전체적인 목소리가 아니며, 외국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현실을 무시한 일부의 의견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이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1989년에 진보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항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만들었고, 한국기독교의 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말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화, 독립운동, 건국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오늘의 한국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했고, 그 결과 한국의 중요 종교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의 역사』3(한국기독교역사학회편, 기독교문사, 2011)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개신교사, 1832-1910』(백락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EB%8C%80%ED%95%9C%EA%B0%90%EB%A6%AC%ED%9A%8C [문단편집 및 강조는 답변자]

역사

일본 주재 선교사로 활동하던 미국 북감리교회(미감리회) 소속의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Robert S. Maclay) 선교사가 1884년 6월 24일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선교회사업(의료 및 교육)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1] 다음해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교회 소속의 목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와 의사 윌리엄 스크랜턴(Dr. William B. Scranton),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윌리엄 스크랜톤의 어머니)이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2]

미국 남감리교회에서는 1895년 10월 동양 선교를 주관하던 헨드릭스 감독(Bishop Eugene R. Hendrix)과 리이드 박사(Dr. Clarence Frederick Reid)가 내한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북감리회를 미리미교회라고 했고, 남감리회를 감리회라고 불렀다.[3]

최초 전래시는 미국 북부의 감리회와 미국 남부의 감리회에서 온 선교사들이 별도로 연회[4]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 12월 2일 미국의 남북감리교회의 통합보다 앞서 양측의 감리교회의 통합 전권을 위임받아 조선의 두 연회가 통합하여 "기독교 조선 감리회"가 창설되었고, 이는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연합이라는 아름다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후 일본의 강요로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창설된 후 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당한 감리교회는, 해방 후 다시 분리되어 새로 교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재건파와 복흥파로 분리되는 등 홍역을 앓았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통합되어 1949년 현재의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후 1971년 경기연회 사건으로 총리원과 총회(갱신)측으로 분리되기도 하였으나 [3], 이후 재통합돼 감리교단은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 교파중에서 유일하게 교파 분열을 겪지 않은 교단이다. 다만 2008년 감독회장 선거로 시작된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출 논쟁이 있었으나 2013년 전용재 목사가 감독회장에 당선됨으로써 일단락됐다. 현재까지 감독 선출과 교회 운영은 감리회 본부와 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리교단의 본부는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관계된 교육기관으로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로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가 있다. 이외에도 선교초기부터 의료,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했으며, 대표적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외에도 복지 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1901년 김창식, 김기범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목사로 안수받았다.[5] 또한 1930년대에 여성 선교사들의 목사 안수를 시작하였고,[6][7] 1955년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한국의 두 여성 전밀라, 명화용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가입되어 있다. 70년대에는 민주화투쟁 및 노동자 운동, 도시산업활동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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